本次自《三國史記》中,節錄新羅、高句麗、百濟三國始祖的建國神話,來觀察看看這三個國家的始祖們建國的過程有何異同。這一次我們先來看一看新羅始祖的建國過程,新羅早期由朴、昔、金三氏輪流當王,三姓的始祖分別為朴赫居世、昔脫解和金閼智。從第十七代奈勿王開始,一直到統一新羅末期,都是由金氏為王。直到第五十三代神德王回到朴氏,而新羅最後一位國王第五十六代敬順王又回到金氏,他即位後七年將寶座讓予高麗太祖王建,結束了後三國時期,而千年王國新羅也就此劃下句點了。
首先我們先來看【新羅本紀】中對於新羅始祖朴赫居世的記載:
【韓國語版本】
시조의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 4월 병진 (정월 15일 이라고도 한다.)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이다. 이 때 나이는 열 세 살이었으며 나라 이름은 서라벌이었다.
【漢文原文】
始祖姓朴氏,諱赫居世。前漢孝宣帝五鳳元年甲子四月丙辰卽位(一曰正月十五日),號居西干,時年十三,國號徐那伐。
依據《三國史記》的記載,新羅始祖朴赫居世是三國中最先建立國家的,他在西漢宣帝五鳳元年,即西元前57年建立新羅。不過,許多史學家對於《三國史記》的這個記載多為存疑,認為新羅應該是三國中最晚從部落聯盟進入封建國家的,最早的是高句麗,接著是百濟,最後才是新羅。而《三國史記》這樣的記載,是因為該書以新羅史料為中心,為了將新羅提至位於三國之首的地位而修改了史實。朴赫居世在位六十年,是新羅在位最久的君主,以當時的生活水準來看,如此高壽實在不甚合理。在這裡我們也看到新羅的國號出現了,叫作「徐那伐」,也稱作「徐羅伐」。而朴赫居世的稱號叫作「居西干」,為什麼叫作「徐羅伐」和「居西干」呢?我們先繼續看下去。
【韓國語版本】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분산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의 양산촌이라 하고, 둘째는 돌산의 고허촌이라 하고, 셋째는 취산의 진지촌(혹은 간진촌이라고도 한다.)이라 하고, 넷째는 무산의 대수촌이라 하고, 다섯째는 금산의 가리촌이라 하고, 여섯째는 명활산의 고야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漢文原文】
先是,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爲六村:一曰閼川楊山村,二曰突山高墟村,三曰觜山珍支村(或云干珍村),四曰茂山大樹村,五曰金山加利村,六曰明活山高耶村,是爲辰韓六部。
這一段基本上是介紹三韓之中的辰韓的六部,名字稍加瀏覽即可,這六部都位於現今韓國慶尚北道慶州市內。本節說明辰韓六部都是古朝鮮的遺民,不過這裡我們要參考一下中國史書《三國志》魏書東夷傳的記載。
「辰韓者,古之辰國也。……辰韓在馬韓之東,其耆老傳世,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馬韓割其東界地與之。有城柵。其言語不與馬韓同,名國爲邦,弓爲弧,賊爲寇,行酒爲行觴。相呼 皆爲徒,有似秦人,非但燕、齊之名物也。名樂浪人爲阿殘;東方人名我爲阿,謂樂浪人本其殘餘人。今有名之爲秦韓者。始有六國,稍分爲十二國。」
按照《三國志》的記載,辰韓人是為了逃避秦朝的徭役而逃到朝鮮半島來,馬韓將東邊的領土讓予辰韓,言語民風與秦人相同,又稱為秦韓。現代韓語中,「秦」和「辰」亦是同音。不過這裡應注意一點,這裡的秦人不大可能是指中原人,應該是秦朝統治範圍之下的東夷族人。
接下來我們來看一看朴赫居世的誕生。
【韓國語版本】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꿇어 앉아 울고 있었다. 그가 즉시 가서 보니 말은 갑자기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었다. 이것을 쪼개자 그 속에서 어린아이가 나왔다. 그는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의 나이 10여 세가 되자 지각이 들고 영리하며 행동이 조신하였다. 6부 사람들이 그의 출생을 기이하게 여겨 높이 받들다가, 이 때에 이르러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漢文原文】
高墟村長蘇伐公望楊山麓,蘿井傍林間,有馬跪而嘶,則往觀之。忽不見馬,只有大卵。剖之,有嬰兒出焉,則收而養之。及年十餘歲,岐嶷然夙成。六部人以其生神異,推尊之,至是立爲君焉。
這一段說明了朴赫居世是如何出生的,辰韓六部中的高墟村的村長在樹林間發現了一個蛋,剖開蛋之後有一個嬰兒,便將他收養。當然這個嬰兒就是赫居世王,因為他的出生實在太神了,所以辰韓人們便擁立他為王,也因此建立了新羅。
【韓國語版本】
진한 사람들은 호(瓠)를 "박"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의 큰 알이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이라고 하였다. 거서간을 진한에서는 왕이라고 하였다. (혹은 귀인을 칭하는 말이라고도 한다.)
【漢文原文】
辰人謂瓠爲朴,以初大卵如瓠,故以朴爲姓。居西干,辰言王(或云呼貴人之稱)。
這一段說明了韓國朴姓的由來,因為赫居世王是從一顆蛋裡出生的,而那顆蛋大如瓠瓜,在辰韓語中將瓠瓜稱作朴,所以以朴為姓。請記得赫居世王是從蛋裡面生出來的,這種出生的傳說是阿爾泰民族的特色,這和另外二位始祖昔脫解及金閼智,以及和下次我們要介紹的夫餘金蛙王以及高句麗東明聖王朱蒙的誕生,有著異曲同工之妙。
這裡要解釋一下何謂居西干,《三國史記》中很簡單地說居西干就是辰韓語的王或是貴人的意思,「干」字在辰韓語中與其它阿爾泰語的「汗、可汗」等詞可能是同源詞,而「居西」一詞,則可能與馬韓有關。按照上述《三國志》中的記載,馬韓割其東邊的領土給辰韓,馬韓在辰韓的西邊,此亦可見得當時馬韓的勢力和領土範圍皆相當強大,至少比當時的辰韓要強,辰韓在很長一段時間還是受到馬韓的控制。因此,居西干原本所指的應該是馬韓王,當朴赫居世被擁立為王後,自然順理成章繼承了居西干的稱號。而居西干的稱號在新羅歷代各王之中只有始祖朴赫居世一個人使用,赫居世的兒子第二代新羅王南解的稱號是「次次雄」,而第三代儒理尼師今開始,新羅國王的稱號為「尼師今」,第十七代奈勿尼師今起又稱作「麻立干」。直到第二十三代法興王開始,將稱號改為中國式的「王」,此後直到滅亡之止,新羅國王的稱號都是王。
再順道討論一下「尼師今」。「尼師今 (이사금)」又稱「齒叱今」為漢文的「齒理」之意,即牙齒痕跡的意思。據《三國遺事》記載,第二代南解王死後,他的兒子儒理本來要讓位給昔脫解,他說:「吾聞聖智人多齒」。可知上古當時的風俗認為牙齒保留較多的年長者是較有智慧的,而這個風俗也因此轉為對年長智者,進而成為國王的稱號。現代韓語的「임금」(即『君主』之意) 這個字,即是自新羅國王的稱號尼師今演變而來。
看完了朴赫居世的誕生與建國,接下來我們來看昔氏的始祖昔脫解的誕生故事。在《三國史記》卷一脫解尼師今的記載如下:
【韓國語版本】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다. 이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으로 천 리 밖에 있다. 본래 그 나라 왕은 여국의 왕녀를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이는 상서로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리라"라고 말하였다. 그 여인이 알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함께 싸서 상자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그 상자는 처음에 금관국 해변에 닿았다. 금관 사람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그 상자는 다시 진한 아진포 어구에 닿았다. 이 때가 곧 시조 혁거세 39년이었다. 그 때 해변에 사는 할머니가 상자를 줄로 끌어올려 해안에 매어 놓고 열어보니,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 노인은 이 아이를 데려다 길렀다. 이 아이가 어른이 되자 키가 9척이 되었으며, 기풍과 정신이 훌륭하였고,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漢文原文】
脫解本多婆那國所生也,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初其國王娶女國王女爲妻,有娠七年乃生大卵。王曰:「人而生卵,不祥也,宜棄之。」其女不忍,以帛裹卵并寶 物,置於櫝中,浮於海,任其所往。初至金官國海邊,金官人怪之不取。又至辰韓阿珍浦口,是始祖赫居世在位三十九年也。時海邊老母以繩引繫海岸,開櫝見之, 有一小兒在焉,其母取養之。及壯,身長九尺,風神秀朗,智識過人。
這裡我們仔細來看一看昔脫解的出生,他出生於多婆那國,該地在倭國東北一千里。多婆那國是什麼地方呢?首先,這裡的倭國不能直接斷定就是整個日本,事實上從中國史書和三國史記的記載來看,上古時期中原人甚至新羅人對於倭國的地理位置其實是很模糊的,一般認為倭國是在辰韓的東南方,史書中所稱的倭國,很多時候指的是現在日本的九州或是中國地方。以此推算,距九州東北一千里,地名近似多婆那的地方,有山陰道的丹波國 (たんば),也就是現在的京都府中部和兵庫縣東部,以及山陰道的但馬國 (たじま),也就是現在的兵庫縣北部。此外,多婆那的發音和耽羅有點接近,因此也有人推測多婆那國就是耽羅國,也就是現在的濟州島。
不過,對於多婆那國另外還有一種看法。認為「多婆那」是來自梵語和古坦米爾語的 Tapana,為「太陽」之意,這是南印度注輦王國 (Chola) 的別名,注輦王國位於現今印度坦米爾那社邦。或者說是自西域傳入的犍陀羅 (Gandharva) 信仰之後所改的國名。犍陀羅是婆羅門教侍奉帝釋天的樂神,為天龍八部之一。但是無論注輦國或是犍陀羅信仰的傳入,都和昔脫解的時代相去甚遠。持此一看法的解釋,多是認為這是後來才改的名,而去倭國東北一千里云云也是後人加進去的。
要注意的一點,昔脫解也是從一顆蛋裡面出生的。為什麼都是從蛋裡面出生的呢?這個留待下次講到一樣從蛋裡面出生的高句麗始祖朱蒙時再來一起探討。昔脫解不但從蛋裡出生,還被放到木盒子裡漂洋過海來到新羅,這點和他未來的養子,也就是下面要探討的金姓始祖金閼智的出生可以做為比較。一開始他先漂到弁韓之一的金官國,也就是現今慶尚南道金海市,金官國是後來伽耶聯盟重要的組成部落之一。而後繼續漂到阿珍浦,即現今慶尚北道慶州市陽南面,被一老婦收養。
【韓國語版本】
어떤 사람이 "이 아이는 성씨를 알 수 없으나 처음 상자가 도착하였을 때, 까치 한 마리가 울면서 날아 따라 왔으니, 까치 작(鵲)자를 줄여 '석(昔)'으로 성을 삼는 것이 좋겠고, 또한 상자를 풀고 나왔으니, '벗을 탈(脫)'과 '풀 해(解)'로 이름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탈해는 처음에는 고기잡이를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는 한번도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골격과 관상이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에 종사하여 공명을 세우라"라고 말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학문에 전념하였고 동시에 지리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양산 아래에 있는 호공의 집을 보고 그 곳이 좋은 집터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꾀를 써서 이 터를 얻어 그 곳에서 살았다. 이 땅은 뒷날 월성터가 되었다.
【漢文原文】
或曰:「此兒不知姓氏,初櫝來時,有一鵲飛鳴而隨之。宜省鵲字,以昔爲氏。又解韞櫝而出,宜名脫解。」脫解始以漁釣爲業,供養其母,未嘗有懈色。母謂曰:「汝非常人,骨相殊異,宜從學以立功名。」於是,專精學問,兼知地理。望楊山下瓠公宅,以爲吉地,設詭計,以取而居之,其地後爲月城。
這裡述說昔姓的由來,是從鵲字省改而來的,不過現今韓國姓昔的人已經很少了。
【韓國語版本】
남해왕 5년에 이르러 그가 어질다는 소문이 나자 왕은 자기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7년에 그를 등용하여 대보로 임명하고 정사를 맡겼다. 유리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말했다. "선왕은 '내가 죽은 후에 아들과 사위를 막론하고 나이가 많고 현명한 자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라'고 유언하였다. 이리하여 내가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제는 마땅히 왕위를 탈해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漢文原文】
至南解王五年,聞其賢,以其女妻之。至七年,登庸爲大輔,委以政事。儒理將死曰:「先王顧命曰,吾死後無論子壻,以年長且賢者繼位。是以寡人先立,今也宜傳其位焉。」
這裡講解為何昔脫解能夠取代朴氏成為新羅王的原因。第二代南解王招昔脫解為駙馬,並拜他為大輔,國家的政事都委由昔脫解處理。南解王死後,他的兒子即位,是為儒理王,這時朝政還是多由昔脫解所掌握。儒理王過世前將王位傳給昔脫解,說是讓賢,不如說是國政完全被昔氏一族所壟斷的情況下不得不的選擇,儒理王在位期間有名無實,昔脫解實際上早已是真正的新羅王。昔脫解在儒理王死後繼任為第四代新羅王,這時他已經六十二歲了,但是他活得相當久,在位二十四年。脫解王死後王位又回到儒理王的兒子婆娑王。
接下來我們來看金姓始祖金閼智的誕生。在脫解王在位九年的時候,《三國史記》有如下的記載。
【韓國語版本】
9년 봄 3월 왕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날이 샐 무렵에 호공을 보내 어찌된 일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호공이 가보니 그 곳에는 나무 가지에 금빛나는 작은 상자가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이를 보고하였다. 왕은 사람을 보내 그 상자를 가져와 열게 하였다. 그 속에는 어린 사내 아이가 들어 있었고, 그 아이는 자태와 용모가 뛰어났다. 왕이 기뻐하며 측근들에게 "이 아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로 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고, 그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그의 이름을 알지라고 하였다. 그는 금빛이 나는 상자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 시림을 고쳐 계림이라 부르고, 이를 국호로 하였다.
【漢文原文】
九年春三月,王夜聞金城西始林樹間有鷄鳴聲,遲明遣瓠公視之,有金色小櫝掛樹枝,白鷄鳴於其下。瓠公還告,王使人取櫝開之,有小男兒在其中,姿容奇偉,上喜謂左右曰:「此豈非天遺我以令胤乎。」乃收養之。及長,聰明多智略,乃名閼智。以其出於金櫝,姓金氏。改始林名鷄林,因以爲國號。
仔細看一看金閼智的出生,他是從一個黃金盒子之中誕生的。昔脫解看到他,便收他為養子。因為他是從一個黃金的盒子誕生的,所以以金為氏。韓國第一大姓金姓有二個起源,一個就是源自新羅的金閼智,而另一支則源自大伽耶國的始祖金首露。金閼智本人並沒有當上新羅王,不過他是昔脫解的養子的身份,在掌握新羅朝政的昔氏一族有很高的地位。一直到金閼智的第六世孫,新羅第十三代味鄒王,才為金氏一族的第一次即王位。
在這一段我們又看到了新羅的另一個國號「雞林」,是該來談談新羅的國號的時候了。前面看到新羅的國號「徐那伐」或「徐羅伐 (서라벌)」,依申采浩《朝鮮上古史》的說法,徐羅伐是來自「새라불」一詞,「새라」為河川名,而「불」則是田地的意思。
這裡我們來看一下《三國遺事》卷一紀異新羅始祖赫居世王的記載:
「辰韓之地,古有六村。一曰閼川楊山村,南今曇嚴寺,長曰謁平,初降于瓢嵓峯,是為及梁部李氏祖。二曰突山高墟村,長曰蘇伐都利,初降于兄山,是為沙梁部鄭氏祖,今曰南山部,仇良伐麻等烏道北迴德等南村屬焉。」
這裡有二個名詞要特別留意,一個是「沙梁部」,另一個是「蘇伐都利」。突山高墟村的村長就是赫居世王的養父,他叫作蘇伐都利,所在的部名後來稱作沙梁部。「沙梁」即「새라」,而蘇伐都利,亦是「새라불」地名所轉化的人名。
《三國遺事》中對於新羅國號又有如下記載:
「國號徐羅伐,又徐伐,或云斯羅,又斯盧。初王生於雞井,故或云雞林國。以其雞龍現瑞也。一說,脫解王時得金閼智,而雞鳴於林中,乃改國號為雞林,後世遂定新羅之號。」
這裡我們可知,「新羅」這個國號,實際上就是來自「斯盧、斯羅」,而這些都是「徐羅伐」的別稱。《三國志》魏書韓傳中記載:「弁辰亦十二國,又有諸小別邑,各有渠帥……有已柢國、不斯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弁、辰韓合二十四國。」這裡我們亦看到「斯盧國」,這斯盧國就是新羅的前身。現代日語「新羅」二字讀作「しらぎ (shi-ra-gi)」,即是「斯盧」二字的上古發音的遺留。
脫解王將國號改成「雞林」之後沿用了一段時間,史書上所稱的「雞林國」也正是新羅。一直到第十五代基臨王,才將國號改回新羅。國號改稱新羅後,隨著新羅國土的擴張,徐羅伐一詞的使用逐漸回到地名,用以指新羅的首都,也就是現今的慶尚北道慶州市。而徐羅伐 (서라벌) 這個詞,經過歷代演變而成為現在的首爾 (서울) 。
對於新羅的由來~新羅大儒~崔致遠(曾經在唐朝當過官)~說新羅者~辰韓之繼承者也~而辰韓~為秦漢之別音~也就是~崔致遠認為新羅人為秦漢兩朝遷移至朝鮮半島的難民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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