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年10月24日 星期五

不負責韓國歷史講座 — 新羅始祖

本次自《三國史記》中,節錄新羅、高句麗、百濟三國始祖的建國神話,來觀察看看這三個國家的始祖們建國的過程有何異同。這一次我們先來看一看新羅始祖的建國過程,新羅早期由朴、昔、金三氏輪流當王,三姓的始祖分別為朴赫居世、昔脫解和金閼智。從第十七代奈勿王開始,一直到統一新羅末期,都是由金氏為王。直到第五十三代神德王回到朴氏,而新羅最後一位國王第五十六代敬順王又回到金氏,他即位後七年將寶座讓予高麗太祖王建,結束了後三國時期,而千年王國新羅也就此劃下句點了。

首先我們先來看【新羅本紀】中對於新羅始祖朴赫居世的記載:

【韓國語版本】
시조의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 4월 병진 (정월 15일 이라고도 한다.)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이다. 이 때 나이는 열 세 살이었으며 나라 이름은 서라벌이었다.

【漢文原文】
始祖姓朴氏,諱赫居世。前漢孝宣帝五鳳元年甲子四月丙辰卽位(一曰正月十五日),號居西干,時年十三,國號徐那伐。

依據《三國史記》的記載,新羅始祖朴赫居世是三國中最先建立國家的,他在西漢宣帝五鳳元年,即西元前57年建立新羅。不過,許多史學家對於《三國史記》的這個記載多為存疑,認為新羅應該是三國中最晚從部落聯盟進入封建國家的,最早的是高句麗,接著是百濟,最後才是新羅。而《三國史記》這樣的記載,是因為該書以新羅史料為中心,為了將新羅提至位於三國之首的地位而修改了史實。朴赫居世在位六十年,是新羅在位最久的君主,以當時的生活水準來看,如此高壽實在不甚合理。在這裡我們也看到新羅的國號出現了,叫作「徐那伐」,也稱作「徐羅伐」。而朴赫居世的稱號叫作「居西干」,為什麼叫作「徐羅伐」和「居西干」呢?我們先繼續看下去。

【韓國語版本】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분산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의 양산촌이라 하고, 둘째는 돌산의 고허촌이라 하고, 셋째는 취산의 진지촌(혹은 간진촌이라고도 한다.)이라 하고, 넷째는 무산의 대수촌이라 하고, 다섯째는 금산의 가리촌이라 하고, 여섯째는 명활산의 고야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漢文原文】
先是,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爲六村:一曰閼川楊山村,二曰突山高墟村,三曰觜山珍支村(或云干珍村),四曰茂山大樹村,五曰金山加利村,六曰明活山高耶村,是爲辰韓六部。

這一段基本上是介紹三韓之中的辰韓的六部,名字稍加瀏覽即可,這六部都位於現今韓國慶尚北道慶州市內。本節說明辰韓六部都是古朝鮮的遺民,不過這裡我們要參考一下中國史書《三國志》魏書東夷傳的記載。

辰韓者,古之辰國也。……辰韓在馬韓之東,其耆老傳世,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馬韓割其東界地與之。有城柵。其言語不與馬韓同,名國爲邦,弓爲弧,賊爲寇,行酒爲行觴。相呼 皆爲徒,有似秦人,非但燕、齊之名物也。名樂浪人爲阿殘;東方人名我爲阿,謂樂浪人本其殘餘人。今有名之爲秦韓者。始有六國,稍分爲十二國。

按照《三國志》的記載,辰韓人是為了逃避秦朝的徭役而逃到朝鮮半島來,馬韓將東邊的領土讓予辰韓,言語民風與秦人相同,又稱為秦韓。現代韓語中,「秦」和「辰」亦是同音。不過這裡應注意一點,這裡的秦人不大可能是指中原人,應該是秦朝統治範圍之下的東夷族人。

接下來我們來看一看朴赫居世的誕生。

【韓國語版本】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꿇어 앉아 울고 있었다. 그가 즉시 가서 보니 말은 갑자기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었다. 이것을 쪼개자 그 속에서 어린아이가 나왔다. 그는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의 나이 10여 세가 되자 지각이 들고 영리하며 행동이 조신하였다. 6부 사람들이 그의 출생을 기이하게 여겨 높이 받들다가, 이 때에 이르러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漢文原文】
高墟村長蘇伐公望楊山麓,蘿井傍林間,有馬跪而嘶,則往觀之。忽不見馬,只有大卵。剖之,有嬰兒出焉,則收而養之。及年十餘歲,岐嶷然夙成。六部人以其生神異,推尊之,至是立爲君焉。

這一段說明了朴赫居世是如何出生的,辰韓六部中的高墟村的村長在樹林間發現了一個蛋,剖開蛋之後有一個嬰兒,便將他收養。當然這個嬰兒就是赫居世王,因為他的出生實在太神了,所以辰韓人們便擁立他為王,也因此建立了新羅。

【韓國語版本】
진한 사람들은 호(瓠)를 "박"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의 큰 알이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이라고 하였다. 거서간을 진한에서는 왕이라고 하였다. (혹은 귀인을 칭하는 말이라고도 한다.)

【漢文原文】
辰人謂瓠爲朴,以初大卵如瓠,故以朴爲姓。居西干,辰言王(或云呼貴人之稱)。

這一段說明了韓國朴姓的由來,因為赫居世王是從一顆蛋裡出生的,而那顆蛋大如瓠瓜,在辰韓語中將瓠瓜稱作朴,所以以朴為姓。請記得赫居世王是從蛋裡面生出來的,這種出生的傳說是阿爾泰民族的特色,這和另外二位始祖昔脫解及金閼智,以及和下次我們要介紹的夫餘金蛙王以及高句麗東明聖王朱蒙的誕生,有著異曲同工之妙。

這裡要解釋一下何謂居西干,《三國史記》中很簡單地說居西干就是辰韓語的王或是貴人的意思,「干」字在辰韓語中與其它阿爾泰語的「汗、可汗」等詞可能是同源詞,而「居西」一詞,則可能與馬韓有關。按照上述《三國志》中的記載,馬韓割其東邊的領土給辰韓,馬韓在辰韓的西邊,此亦可見得當時馬韓的勢力和領土範圍皆相當強大,至少比當時的辰韓要強,辰韓在很長一段時間還是受到馬韓的控制。因此,居西干原本所指的應該是馬韓王,當朴赫居世被擁立為王後,自然順理成章繼承了居西干的稱號。而居西干的稱號在新羅歷代各王之中只有始祖朴赫居世一個人使用,赫居世的兒子第二代新羅王南解的稱號是「次次雄」,而第三代儒理尼師今開始,新羅國王的稱號為「尼師今」,第十七代奈勿尼師今起又稱作「麻立干」。直到第二十三代法興王開始,將稱號改為中國式的「王」,此後直到滅亡之止,新羅國王的稱號都是王。

再順道討論一下「尼師今」。「尼師今 (이사금)」又稱「齒叱今」為漢文的「齒理」之意,即牙齒痕跡的意思。據《三國遺事》記載,第二代南解王死後,他的兒子儒理本來要讓位給昔脫解,他說:「吾聞聖智人多齒」。可知上古當時的風俗認為牙齒保留較多的年長者是較有智慧的,而這個風俗也因此轉為對年長智者,進而成為國王的稱號。現代韓語的「임금」(即『君主』之意) 這個字,即是自新羅國王的稱號尼師今演變而來。

看完了朴赫居世的誕生與建國,接下來我們來看昔氏的始祖昔脫解的誕生故事。在《三國史記》卷一脫解尼師今的記載如下:

【韓國語版本】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다. 이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으로 천 리 밖에 있다. 본래 그 나라 왕은 여국의 왕녀를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이는 상서로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리라"라고 말하였다. 그 여인이 알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함께 싸서 상자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그 상자는 처음에 금관국 해변에 닿았다. 금관 사람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그 상자는 다시 진한 아진포 어구에 닿았다. 이 때가 곧 시조 혁거세 39년이었다. 그 때 해변에 사는 할머니가 상자를 줄로 끌어올려 해안에 매어 놓고 열어보니,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 노인은 이 아이를 데려다 길렀다. 이 아이가 어른이 되자 키가 9척이 되었으며, 기풍과 정신이 훌륭하였고,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漢文原文】
脫解本多婆那國所生也,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初其國王娶女國王女爲妻,有娠七年乃生大卵。王曰:「人而生卵,不祥也,宜棄之。」其女不忍,以帛裹卵并寶 物,置於櫝中,浮於海,任其所往。初至金官國海邊,金官人怪之不取。又至辰韓阿珍浦口,是始祖赫居世在位三十九年也。時海邊老母以繩引繫海岸,開櫝見之, 有一小兒在焉,其母取養之。及壯,身長九尺,風神秀朗,智識過人。

這裡我們仔細來看一看昔脫解的出生,他出生於多婆那國,該地在倭國東北一千里。多婆那國是什麼地方呢?首先,這裡的倭國不能直接斷定就是整個日本,事實上從中國史書和三國史記的記載來看,上古時期中原人甚至新羅人對於倭國的地理位置其實是很模糊的,一般認為倭國是在辰韓的東南方,史書中所稱的倭國,很多時候指的是現在日本的九州或是中國地方。以此推算,距九州東北一千里,地名近似多婆那的地方,有山陰道的丹波國 (たんば),也就是現在的京都府中部和兵庫縣東部,以及山陰道的但馬國 (たじま),也就是現在的兵庫縣北部。此外,多婆那的發音和耽羅有點接近,因此也有人推測多婆那國就是耽羅國,也就是現在的濟州島。

不過,對於多婆那國另外還有一種看法。認為「多婆那」是來自梵語和古坦米爾語的 Tapana,為「太陽」之意,這是南印度注輦王國 (Chola) 的別名,注輦王國位於現今印度坦米爾那社邦。或者說是自西域傳入的犍陀羅 (Gandharva) 信仰之後所改的國名。犍陀羅是婆羅門教侍奉帝釋天的樂神,為天龍八部之一。但是無論注輦國或是犍陀羅信仰的傳入,都和昔脫解的時代相去甚遠。持此一看法的解釋,多是認為這是後來才改的名,而去倭國東北一千里云云也是後人加進去的。

要注意的一點,昔脫解也是從一顆蛋裡面出生的。為什麼都是從蛋裡面出生的呢?這個留待下次講到一樣從蛋裡面出生的高句麗始祖朱蒙時再來一起探討。昔脫解不但從蛋裡出生,還被放到木盒子裡漂洋過海來到新羅,這點和他未來的養子,也就是下面要探討的金姓始祖金閼智的出生可以做為比較。一開始他先漂到弁韓之一的金官國,也就是現今慶尚南道金海市,金官國是後來伽耶聯盟重要的組成部落之一。而後繼續漂到阿珍浦,即現今慶尚北道慶州市陽南面,被一老婦收養。

【韓國語版本】
어떤 사람이 "이 아이는 성씨를 알 수 없으나 처음 상자가 도착하였을 때, 까치 한 마리가 울면서 날아 따라 왔으니, 까치 작(鵲)자를 줄여 '석(昔)'으로 성을 삼는 것이 좋겠고, 또한 상자를 풀고 나왔으니, '벗을 탈(脫)'과 '풀 해(解)'로 이름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탈해는 처음에는 고기잡이를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는 한번도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골격과 관상이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에 종사하여 공명을 세우라"라고 말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학문에 전념하였고 동시에 지리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양산 아래에 있는 호공의 집을 보고 그 곳이 좋은 집터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꾀를 써서 이 터를 얻어 그 곳에서 살았다. 이 땅은 뒷날 월성터가 되었다.

【漢文原文】
或曰:「此兒不知姓氏,初櫝來時,有一鵲飛鳴而隨之。宜省鵲字,以昔爲氏。又解韞櫝而出,宜名脫解。」脫解始以漁釣爲業,供養其母,未嘗有懈色。母謂曰:「汝非常人,骨相殊異,宜從學以立功名。」於是,專精學問,兼知地理。望楊山下瓠公宅,以爲吉地,設詭計,以取而居之,其地後爲月城。

這裡述說昔姓的由來,是從鵲字省改而來的,不過現今韓國姓昔的人已經很少了。

【韓國語版本】
남해왕 5년에 이르러 그가 어질다는 소문이 나자 왕은 자기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7년에 그를 등용하여 대보로 임명하고 정사를 맡겼다. 유리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말했다. "선왕은 '내가 죽은 후에 아들과 사위를 막론하고 나이가 많고 현명한 자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라'고 유언하였다. 이리하여 내가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제는 마땅히 왕위를 탈해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漢文原文】
至南解王五年,聞其賢,以其女妻之。至七年,登庸爲大輔,委以政事。儒理將死曰:「先王顧命曰,吾死後無論子壻,以年長且賢者繼位。是以寡人先立,今也宜傳其位焉。」

這裡講解為何昔脫解能夠取代朴氏成為新羅王的原因。第二代南解王招昔脫解為駙馬,並拜他為大輔,國家的政事都委由昔脫解處理。南解王死後,他的兒子即位,是為儒理王,這時朝政還是多由昔脫解所掌握。儒理王過世前將王位傳給昔脫解,說是讓賢,不如說是國政完全被昔氏一族所壟斷的情況下不得不的選擇,儒理王在位期間有名無實,昔脫解實際上早已是真正的新羅王。昔脫解在儒理王死後繼任為第四代新羅王,這時他已經六十二歲了,但是他活得相當久,在位二十四年。脫解王死後王位又回到儒理王的兒子婆娑王。

接下來我們來看金姓始祖金閼智的誕生。在脫解王在位九年的時候,《三國史記》有如下的記載。

【韓國語版本】
9년 봄 3월 왕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날이 샐 무렵에 호공을 보내 어찌된 일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호공이 가보니 그 곳에는 나무 가지에 금빛나는 작은 상자가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이를 보고하였다. 왕은 사람을 보내 그 상자를 가져와 열게 하였다. 그 속에는 어린 사내 아이가 들어 있었고, 그 아이는 자태와 용모가 뛰어났다. 왕이 기뻐하며 측근들에게 "이 아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로 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고, 그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그의 이름을 알지라고 하였다. 그는 금빛이 나는 상자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 시림을 고쳐 계림이라 부르고, 이를 국호로 하였다.

【漢文原文】
九年春三月,王夜聞金城西始林樹間有鷄鳴聲,遲明遣瓠公視之,有金色小櫝掛樹枝,白鷄鳴於其下。瓠公還告,王使人取櫝開之,有小男兒在其中,姿容奇偉,上喜謂左右曰:「此豈非天遺我以令胤乎。」乃收養之。及長,聰明多智略,乃名閼智。以其出於金櫝,姓金氏。改始林名鷄林,因以爲國號。

仔細看一看金閼智的出生,他是從一個黃金盒子之中誕生的。昔脫解看到他,便收他為養子。因為他是從一個黃金的盒子誕生的,所以以金為氏。韓國第一大姓金姓有二個起源,一個就是源自新羅的金閼智,而另一支則源自大伽耶國的始祖金首露。金閼智本人並沒有當上新羅王,不過他是昔脫解的養子的身份,在掌握新羅朝政的昔氏一族有很高的地位。一直到金閼智的第六世孫,新羅第十三代味鄒王,才為金氏一族的第一次即王位。

在這一段我們又看到了新羅的另一個國號「雞林」,是該來談談新羅的國號的時候了。前面看到新羅的國號「徐那伐」或「徐羅伐 (서라벌)」,依申采浩《朝鮮上古史》的說法,徐羅伐是來自「새라불」一詞,「새라」為河川名,而「불」則是田地的意思。

這裡我們來看一下《三國遺事》卷一紀異新羅始祖赫居世王的記載:
辰韓之地,古有六村。一曰閼川楊山村,南今曇嚴寺,長曰謁平,初降于瓢嵓峯,是為及梁部李氏祖。二曰突山高墟村,長曰蘇伐都利,初降于兄山,是為沙梁部鄭氏祖,今曰南山部,仇良伐麻等烏道北迴德等南村屬焉。

這裡有二個名詞要特別留意,一個是「沙梁部」,另一個是「蘇伐都利」。突山高墟村的村長就是赫居世王的養父,他叫作蘇伐都利,所在的部名後來稱作沙梁部。「沙梁」即「새라」,而蘇伐都利,亦是「새라불」地名所轉化的人名。

《三國遺事》中對於新羅國號又有如下記載:
國號徐羅伐,又徐伐,或云斯羅,又斯盧。初王生於雞井,故或云雞林國。以其雞龍現瑞也。一說,脫解王時得金閼智,而雞鳴於林中,乃改國號為雞林,後世遂定新羅之號。

這裡我們可知,「新羅」這個國號,實際上就是來自「斯盧、斯羅」,而這些都是「徐羅伐」的別稱。《三國志》魏書韓傳中記載:「弁辰亦十二國,又有諸小別邑,各有渠帥……有已柢國、不斯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弁、辰韓合二十四國。」這裡我們亦看到「斯盧國」,這斯盧國就是新羅的前身。現代日語「新羅」二字讀作「しらぎ (shi-ra-gi)」,即是「斯盧」二字的上古發音的遺留。

脫解王將國號改成「雞林」之後沿用了一段時間,史書上所稱的「雞林國」也正是新羅。一直到第十五代基臨王,才將國號改回新羅。國號改稱新羅後,隨著新羅國土的擴張,徐羅伐一詞的使用逐漸回到地名,用以指新羅的首都,也就是現今的慶尚北道慶州市。而徐羅伐 (서라벌) 這個詞,經過歷代演變而成為現在的首爾 (서울) 。

2008年10月8日 星期三

最後的王都 — 第一回 落花巖畔

「國破山河異昔時,獨留江月幾盈虧。
 落花巖畔花猶在,風雨當年未盡吹。」 —— 洪春卿

正是秋意當濃之時,白馬江邊的扶蘇山染滿了楓紅。從扶蘇山上望過去,清徹的白馬江水包圍著扶蘇山緩緩地蜿蜒流過。扶蘇山位於新羅熊川州所夫里郡城的北側,正是拱衛郡城的天然屏障。所夫里郡城北依扶蘇山,南臨白馬江,地勢優越,沿著白馬江而下,東可抵大唐,西可至倭國,可說是這馬韓故地最重要的大城之一。

就在扶蘇山向著白馬江的一側,山腰間有座佛寺,格局不算廣,僅七間連房,名曰皐蘭寺。皐蘭寺前被一片火紅的楓樹遮掩,樹葉的縫隙間隱約可看到那緩緩流動的白馬江。皐蘭寺屋後石壁自然湧出一道清泉,被稱為皐蘭泉,據說飲用這泉水有延壽的功效。這時有二個女子參佛完正從皐蘭寺側門而出,一位做僧尼的拉扮,一身白衣,年紀看上去已近天命之年,但容貌仍稱秀麗,可見其年輕之時姿色定十分出眾。身旁的另一個女子約莫二八年紀,清秀的臉龐仍難脫一絲稚氣。

「師父,我們離開倭國經對馬島,一路上從徐羅伐經過完山城到所夫里來,已經好幾個月了。」那年輕的女子如是說。

「是啊,妳對這所夫里城有什麼樣的感覺呢?」那女尼望著白馬江,若有所思地問道。

「秋天的所夫里城好安靜,雖不像新羅王都徐羅伐那樣熱鬧,但是有一種特別的古城氛圍。聽說這所夫里城附近是百濟的故地,在倭國時常常聽到當年到過百濟的出家師父們講過關於百濟的故事。」

「這所夫里城當年也是不下於徐羅伐的熱鬧大城市啊!」女尼心中暗道,不由得輕嘆一聲。

所夫里城正是百濟滅亡前的最後一個王都泗沘城。西元五三八年,百濟聖王將都城從熊津遷到了泗沘,直到百濟義慈王二十年唐高宗命蘇定方帶領唐軍攻破泗沘城為止,在這一百二十三年來泗沘一直都是這馬韓故地的中心。

此時正是西元六八○年,即新羅文武王二十年,唐高宗永隆元年,百濟滅亡至今正好是二十年。

「走吧,我們往山上去。」言畢,便帶著那年輕女子沿著皐蘭寺旁的階梯拾級而上。石階沿路而上,不一會兒便直抵扶蘇山西北側的一處絕壁。自絕壁向下望,底下便是那宛如玉帶般的白馬江。那絕壁聳立在白馬江畔,矗然而起的白灰色岩壁上幾乎沒有長什麼植物,石塊稜角參差直插天空,從遠處望去頗讓人感到敬畏。

「延愛啊,你知道這個絕壁叫作什麼嗎?」女尼問那年輕女子,但那女子搖頭顯是不知。

「這一帶的人都管這絕壁叫『落花巖』,你知道為什麼嗎?」

不待那名叫延愛的年輕女子回答,又接下去說道:「二十年前,泗沘城破之時,唐軍和新羅軍在泗沘城中燒殺虜掠,百濟王宮中的三千宮女倉皇逃到這城北的扶蘇山城來。然不過多久,蘇定方的數萬唐軍便將這扶蘇山城南側的入口給團團圍住了。」

泗沘城破之時,百濟義慈王帶著太子扶餘隆倉皇逃離泗沘,直奔熊津城,無暇顧及王宮中其他事了。百濟的大臣們也多各自逃命去了,宮中僅留下公主和宮女們,以及人數不到三百人的王宮禁衛軍,根本不是十三萬唐軍和五萬新羅軍聯合部隊的對手。禁衛軍護著公主及宮女們沿著兵備糧道撤到泗沘城北的防禦陣地扶蘇山城內,憑著天險固守。然面對數量佔絕對優勢的唐軍,加上扶蘇山城南側和東側都被唐軍包圍,而北側和西側緊臨白馬江,糧食和軍備的援助幾被困死,城內的戰備儲糧根本不夠這三千多人吃上一天。

到了該日傍晚,唐軍總管蘇定方下令發動攻勢,開始向扶蘇山城南門猛攻。一時火箭齊發,箭如雨下。城內的王宮禁衛軍和僅五百人的山城守備部隊僅能採取不做正面抵抗的戰略,藉著石牆擋住唐軍的箭雨攻擊。不到一刻鐘後,唐軍開始攻城,震天吶喊著的步兵如潮水般湧至南門城下,攻城車接連的衝撞就是厚實的大門也無法抵禦,不一會兒城門就被攻破了。唐軍開始蜂湧進入城內,禁衛軍和守備部隊展開近距離肉搏戰,圍攻衝入城內的唐軍。縱然經過嚴格訓練的百濟禁衛軍稍加擋住了唐軍第一波的攻勢,然而犧牲慘重,面對源源不斷湧來的唐軍,勝負早已註定。禁衛軍總管燕施那羅將殘餘部隊全部後撤至扶蘇山東南側的制高點迎月台,自南門進山城後,沿途都是樹林掩蔽的山坡路,一路直往迎月台。在迎月台頂旁有扶蘇山城內最重要的守軍倉庫,倉庫外圍有夯土的堅實糯米石城牆做為屏障。燕施那羅正是想利用山頂的守軍倉庫做為最後的抵抗據點,自知已無法保全,但仍希望以天色昏暗加上唐軍不諳山城內地形的劣勢,換取公主及宮女們的逃命時間。

燕施那羅派遣二小隊帶著石蠟油向通往迎月台的小徑東西兩側掩至唐軍後方,將石蠟油沿著山徑遍灑而下,點火之後蠟油快速竄燒,山城東南面整片樹林很快便全部燒著了,頓時烈焰衝天,風助火勢,猛烈的大火瞬時燒得唐軍先鋒不得不暫時往山下撤退。此時埋伏在山城腳下的一小隊扶蘇山城守備軍衝出來殺向撤退的唐軍,唐軍一時被殺散了。但唐軍不愧是訓練有素,很快便回復陣形,態勢當下逆轉,居人數劣勢的山城守備軍無力回天,悉數被殲滅,無一倖免。唐軍熊津道大總管蘇定方眼見山城內火光衝天,先鋒部隊又遭伏擊遲攻不下,便立即下令親率中軍強攻迎月台。「全軍前進!攻下山頭!」蘇定方大喊道,一時戰鼓齊鳴,殺聲震天。燕施那羅料唐軍定會選不在迎風面上的西路攻上迎月台以避火勢,將軍械倉庫中僅剩的弓箭全數取出,將禁衛軍悉數部設在西路的石牆,當唐軍接近時便眾箭齊發。蘇定方大軍果從西路而上,雖然禁衛軍像弩機般接連射出箭雨,但絲毫無法抵擋唐軍向軍倉石城靠近。很快地倉內的箭已全數用鑿了,眼看唐軍就要衝進石城內。

「哥延副將,你帶領二十名弟兄從後門小路離開,想辦法帶宮女們離開山城。」燕施那羅發令道。「弟兄們,我們是大百濟國擁有最高光榮的禁衛軍!死,我們一點也不怕!堅守山城,消滅唐賊,誓與山城共存亡!」燕施那羅率領剩下的三十餘人,死守倉庫斷後。唐軍的火炬從山上一路延綿到山城底端,人數少說也有五萬人。燕施那羅心中明白這是最後一戰,這迎月台是扶蘇山東側的最高點,也是控制通往西面最高峰送月台以及北側白馬江渡口的要道,一旦失守等於整個扶蘇山城盡沒敵手。然而以三十餘人的殘兵對抗五萬多人的精銳部隊幾是不可能之事,唐軍如螞蟻般蔓著石牆一個個翻越過來,燕施那羅一行人雖奮力砍殺翻入石城內的唐軍,但沒多久已被唐軍層層包圍,燕施那羅竭力死戰,最後身中十多箭倒下,王宮禁衛軍三十餘人盡歿。

雖說二十名禁衛軍協助宮女們逃命,但實際上除了北面山腳下的白馬江渡口之外已無處可逃。然而百濟在之前的熊津江海戰大量調派戰船支援,百濟水師在與唐國水師接戰後實力大傷,此時白馬江渡口已沒有任何可用的船隻了。因此在山城內的百濟宮女們紛紛退入山內,齊集在那現今稱為落花巖的懸崖絕壁之上。

「當扶蘇山城失守之時,大家都知道這是百濟的末路了。聽著唐軍步步進逼的戰鼓聲和雜沓的腳步聲,想到落入唐軍之手的光景,那真是恐懼到令人難以想像。百濟三千宮女們寧願身死保全名節也不願受辱,在一片絕望的氣氛中,大家像是一同說好了般用眼神互道來世再見,沒有人流淚。宮女們一個個手拉著手,紛紛從這崖上縱身跳入這白馬江,那沒有勇氣自行跳下的也讓別人拉著一起相伴到另一個世界。三千宮女們宛如落花紛紛飄下江面,所以這裡才被稱為落花巖。」女尼敘說著百濟的往事之時,眼眶中不由地泛起了絲絲的淚光。

聽著師父說著那悲戚的過住,延愛似乎也感染到那孤立無助的怨恨。

「那和宮女們一起撤到山城內的百濟公主呢?」延愛問。

「義慈王唯一的公主也混在那群宮女之中,一起從落花巖跳下,以身殉國了。」

「師父,您不是在倭國長大的馬韓人後裔嗎?怎麼會對百濟末年的故事那麼了解呢?」

女尼望著延愛,默不作聲,似不想回答這個問題。延愛大概怎麼也想不到,在她面前的師父,就是當年跳下落花巖的百濟公主。

「都是過去的事情了。走吧,我們回所夫里城去,明日就動身回倭國。」

當年三千宮女縱身跳下,白馬江面浮滿了宮女們無助的悲憤。百濟公主也在其中,隨著白馬江向下游漂流。在距泗沘渡口不遠處,被百濟貴族八大姓之一沙氏的沙善貴救起,發現尚存一息,正是命不該絕,沙善貴將公主妥善地藏在泗沘不遠的古良夫里城中隱密地療養。三個月後,唐軍已經完全控制百濟全境,建立熊津都督府,由大將劉仁願鎮守泗沘城。此時沙氏一門正秘密地將擁有的財產運往倭國,並安排好完全撤至倭國的計畫。百濟和倭國素來交好,兩國往來密切,百濟王室甚至和日本天皇有姻親關係。掌握百濟經濟大權的沙氏一族,自然在百濟和倭國之間的貿易上長年累積了巨大的財富,在倭國亦有諸多據點,以及和倭國皇室貴族的緊密聯繫,在百濟滅亡之後,倭國理所當然成為保存沙氏家門延續的最佳所在。

在沙善貴的懇求下,百濟公主隨著沙善貴一同前往倭國棲身。先是在飛鳥京安頓下來,在百濟滅亡前,和倭國互遣使者往來十分密切,因此百濟公主也曾數次到飛鳥京來,對飛鳥京並不陌生,並且身為百濟的公主當然會說倭語,故在倭國的生活並不困難。飛鳥京是倭國的第一個皇都,周圍為數個小丘所圍繞成一盆地,中央有飛鳥川流過,飛鳥板蓋宮正是當時齊明天皇的居所。齊明天皇曾在板蓋宮中接見百濟公主和沙善貴一行人,公主也在這時見到了在倭國做為人質的二位哥哥扶餘豐和扶餘善光。善光和公主的年紀在各個王子中最為接近,從小也是最談得來的玩伴。善光看見公主,悲喜交集,一把將公主擁入懷中,二人相擁而泣。「我還以為再也見不到哥哥你了。」在倭國見到最親近的哥哥也算稍加撫平了國破家亡的遺恨。

齊明天皇親自在板蓋宮接見公主一行人,在聽完了公主的遭遇後,同樣身為女人的齊明天皇很是同情,隨即下令妥為照顧公主起居。並應了扶餘豐的請求,答應派兵援助扶餘豐返回百濟故地重建百濟國。

齊明天皇對於復興百濟的承諾十分重視,在積極準備一年後,命兒子中大兄皇子傾全國之力支援百濟復國。齊明天皇親自率領倭國軍隊到達九州,但不幸在途中駕崩於筑紫朝倉宮,中大兄皇子即位,是為天智天皇,繼續完成齊明天皇的遺願。倭軍兵分三路,先鋒指揮官阿倍比羅夫護送百濟王子扶餘豐返國即位,配合倭軍中軍主力,順利打敗佔領百濟南部的新羅軍。然而此時唐國由劉仁軌率領水軍七千人,並由劉仁願和新羅王金法敏率領陸上部隊,沿著熊津江而下,水陸夾攻扶餘豐領導的百濟倭國聯合軍。百濟倭國聯合軍和新羅唐國聯合軍在熊津江入海的白村江口進行了決定性的會戰,雖然倭國水軍連番衝向唐國水軍展開攻勢,但中了劉仁軌的火攻之計,倭軍戰船四百餘艘被焚毀,遭到沉重的打擊。扶餘豐連夜逃往高句麗,百濟復興的一場空夢也就此完結了。

「父王、大哥和二個哥哥全被唐軍押往長安城,三哥逃到高句麗,而四哥和我僅能在這倭國找到容身之地。這六百多年的百濟王室難道真的就這樣結束了嗎?」公主在百濟復國失敗後,已經不再對回到故國存有任何希望。不久後傳來義慈王在長安過世的消息,公主悲慟欲絕,待收拾心情後便決心搬入法興寺為父王祈求冥福。這法興寺是當年百濟聖王將佛法傳入倭國後,權臣蘇我馬子在飛鳥京所建立的宏偉佛寺,與百濟淵源頗深。公主在寺中忘卻世事,一心專念。數個月後不顧扶餘善光的哀求,公主在法興寺受戒出家,決定長伴青燈。

這是二十年後第一次回到百濟故土,大百濟國早已隨著時間煙消雲散。站在這落花巖上,當年陪侍在旁的宮女,不知在黃泉路上是否仍相伴而行。父王、母后相繼離開人世,兄弟四散。曾經佔領高句麗國都平壤城,斬殺高句麗故國原王的偉大近肖古王的子孫,如今竟落得如此下場。佛家所謂的人生七種痛苦,其一之愛別離苦,正是如此吧。公主站在落花巖上凝望著白馬江,思緒不由得勾起了當年的回憶。約定一輩子相知相守的那個人,也隨著百濟如風一般消散於歷史的長河之中了。為何命運捉弄如此呢?這都是那反覆無常毀約背信的新羅造成的嗎?還是自恃天威的大唐國呢?

一切都要從百年前的一場戰爭說起。

註一:本文開頭所引用的詩,為朝鮮中期文人洪春卿所寫的「落花巖」一詩。洪春卿,字明仲,號石壁,於中宗時歷任左承旨、漢城府右尹、禮曹參議。中宗昇遐後,於仁宗元年負責撰寫中宗大王的誌文。這首詩是他於某個月夜裡,自白馬江登上落花巖後,回想起百濟當年國破之時,所寫下的一首近體詩。該詩格律為仄起七言絕句,押平聲支韻。

註二:泗沘城,位於現今韓國忠清南道扶餘郡。在百濟時期又稱為所夫里縣,新羅統一後改隸熊川州,改為所夫里郡。新羅景德王十六年 (757年) 改名扶餘郡,沿用至今。

註三:熊津城,位於現今韓國忠清南道公州市。百濟在高句麗入侵喪失漢江流域的主要領土後,文周王將國都南遷至錦江流域的熊津,又稱為熊川。直到聖王將國都再次遷到泗沘為止,熊津作為百濟首都共六十三年。熊津在古百濟語的發音為「古莫那羅(고마나루)」,《日本書紀》中以萬葉假名所注之發音為「久麻那利(くまなり)」,可知熊津二字應為古百濟語的意譯。統一新羅時期改為熊川州,新羅景德王十六年改稱熊州,高麗時期改稱公州,沿用至今。

註四:熊津江即現在流經韓國中部的錦江,在流經扶餘的這一段特別稱為白馬江,白馬江一名沿用至今。

註五:齊明天皇,日本第三十七代天皇,實際上和第三十五代皇極天皇是同一人。名諱寶皇女,為第三十四代舒明天皇的皇后,舒明天皇駕崩之後,在權臣蘇我蝦夷的安排下即位,是為皇極天皇。而後中大兄皇子鏟除把持朝政的蘇我蝦夷和蘇我入鹿父子,皇極天皇因此宣布退位,讓位給她的弟弟,是為孝德天皇。在孝德天皇死後,她又重新即位,是為齊明天皇。韓國研究有一說,齊明天皇就是百濟武王的女兒扶餘寶,為義慈王的姊姊。所以她在百濟被羅唐聯軍所滅後,才會義無反顧沒有任何理由傾全國之力幫助百濟復國。然筆者認為此說不大可信,故於本文中不予採用。據《日本書記》記載,齊明天皇是第三十代敏達天皇的孫女,而她實際上是她的丈夫舒明天皇的侄女。齊明天皇的血統與百濟之間的關聯尚無有力的證據,故在此聊備一格。此外,在古代天皇皇室近親之間跨輩分結婚並不是什麼奇怪罕見的事情,像是聖武天皇也娶了自己的姨媽光明子,這是日本母系氏族社會制度的遺留。

最後的王都 — 序

歷史,總是由贏家掌握了記載和解釋的權力。新羅、百濟、高句麗,這古老的三國,在新羅統一後,百濟和高句麗便喪失了發言權。第一次接觸半島三國史,其中吸引我的,不是繼承大統的新羅,也不是雄踞東北亞的高句麗,而是三國之中最先滅亡的百濟,原因為何我也說不上來。

每嘗閱讀《三國史記》,總覺得真實的百濟不該是這個樣子的,為百濟翻案的想法總縈繞心頭。然而既非考古學家,又非歷史學家的我,只能在虛構的小說世界中找尋腦海中百濟的影子,因此有了這部「最後的王都」的寫作計畫。

故事的情節主要參照真正的史實,從《三國史記》《日本書紀》,以及中國的《北史》《隋書》和《舊唐書》中,逐步建構出百濟的樣子。與其說是小說,倒不如說像是歷史故事的體裁。當然在許多地方不見得真的會按照史書上的記載,畢竟這是還是小說,不是歷史論文。自知以大家皆不熟悉的異國歷史為背景,等同是限縮了潛在讀者的範圍。只希望能引起一些人對於上古東北亞歷史的興趣,則幸甚。